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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근대의 인쇄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08-07-09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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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 인쇄술의 도입

(1) 서양 인쇄술의 전래

우리 나라의 인쇄사를 기술함에 있어 시대 구분을 명확히 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일반적으로 근대 인쇄라 한다면 서양의 신문물의 유입으로 근대식 인쇄기가 처음으로 도입된 1883년부터 시작하여 1945년 8·15 해방까지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고대 인쇄와 근대 인쇄를 구별하는 요인은 단순히 납활자와 근대식 인쇄기가 도입되었다는데 그치지 않고, 제도와 문물의 변화와 더불어 문화산업적인 측면에서도 뚜렷한 구별을 나타내고 있다.

즉, 국내에서 독창적으로 개발해 발전되어 오던 인쇄 기술이 외부로부터의 영향에 힘입어 성장, 발전하였다는 점과 주로 관서인쇄 위주로 발전되어 왔던 그 전까지와는 달리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민간 인쇄사까지 생겨나 인쇄사가 비로소 기업 형태를 띄게 되었다는 점이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이전의 인쇄는 대부분 국가가 통치권을 행사하거나 존속시키려는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조정이나 지방 관아에서 직접 경비를 지출하여 인쇄 기관이나 담당 부서를 운영하였기 때문에 이윤 창출이나 영리를 거의 도외시하였다.

또한, 금속활자를 발명한 우리 선조들은 다른 부문들에서처럼 외국과 교류하는 일이 거의 없이 자체적인 기술로만 운영하여 왔기 때문에 금속활자를 발명한 영예로움에도 불구하고 그 기술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기술 수준이 상대적으로 낙후되고 말아 근대 인쇄술은 외국으로부터 도입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의 근대 인쇄는 이처럼 우리의 인쇄 기술을 계승, 발전시키지 못한 채 외국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 활용하고, 관 주도로 운영되어 오던 인쇄에서 벗어나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인쇄업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고대 인쇄와는 뚜렷이 구별된다.

이에 따라 우리 나라의 근대 인쇄사를 다루는 데 있어서는 우리 민족이 걸어 온 발자취만을 다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쇄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외국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으며, 특히 일제가 끼치고 간 영향을 기술해야만 하는 안타까움은 어찌할 수 없다.

우리 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근대 인쇄술은 모두 15세기 중엽 독일의 구텐베르크에 의해 발명된 납활자와 이를 이용한 활판 인쇄술에서 영향을 받았다. 활판 인쇄술은 서구 세력의 확장과 기독교의 선교 활동으로 세계 각지로 전파되어, 1555년경에는 포르투갈의 선교사에 의해 동양 최초의 활판 인쇄소가 인도의 고아지방에 설치되었고, 1588년에는 마카오까지 전파되었다.

활판 인쇄술은 1590년에는 이탈리아 선교사에 의해 일본과 중국에까지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들 국가에서는 활판 인쇄술을 이단시하여 2백여 년 동안이나 방치하였다가 1807년 기독교 선교사 로버트 마리슨(Robert Marison)이 중국에서《중국어사전》을 인쇄, 출판함으로서 근대 인쇄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고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 사용한 한문활자는 주조 방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활자 재료인 합금에 글자를 직접 새긴 직각활자(直刻活字)였으나 활판 인쇄술의 장점을 인식하게 되어 널리 보급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조선 왕조의 오랜 쇄국정책으로 인해 중국이나 일본처럼 서양인의 손에 의해 직접 전달받지 못하고, 근대 인쇄술의 중요성을 뒤늦게 인식한 우리 민족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70여 년이 지난 뒤에야 일본인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전해 받게 되었다.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고 인쇄술을 일본에 전해 주기도 했던 우리가 근대 인쇄술을 일본으로부터 역수입하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선조들이 독자적으로 발명했던 금속활자처럼 인쇄 기계나 인쇄 기술 개발에도 좀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더라면 근대 인쇄술을 외국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2) 근대 인쇄술의 도입

1) 근대식 납활자의 도입

우리 나라에서의 근대식 납활자는 두 가지 경로로 수입되었다. 그 하나는 중국을 거점으로 하고 있던 기독교 세력에 의한 한글 납활자 제작과 그 인쇄물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을 거쳐 수입된 것들이다. 이처럼 근대 인쇄술이 국내에 도입되기 전에도 이미 중국과 일본에서는 근대식 한글 납활자가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최초의 근대식 한글 납활자는 1880년(고종 17년) 성경을 출판하기 위해 일본에 주재하고 있던 프랑스의 천주교 신부인 리델(Ridel)의 지도 아래 최지혁(崔智爀)이 쓴 글자를 글자본으로 하여 일본 요코하마에서 처음으로 주조되었다. 이 활자가 만들어진 1880년에 요코하마에서《한불자전(韓佛字典)》이 간행되고, 다음 해인 1881년에는《한어문전(韓語文典)》과《텬쥬셩교공과(天主聖敎工課)》가 간행되었다.

1883년에는 이 활자가 요코하마에서 나가사키로 이송되어 천주교 성경과 조선 문화에 대한 서적들이 계속 인출되었으며, 1886년 한불조약이 조인된 후에는 이 활자가 우리 나라로 수입되어 서울에서 성서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개신교에서는 1882년에 처음으로《누가복음》과《요한복음》을 만주 봉천과 우장에서 간행하였다. 이는 조선 정부의 기독교 탄압과 관련되어 있는데, 서양 선교사들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한국인 신자들의 협력을 얻어 선교 목적의 각종 복음서를 인쇄했던 것이다.

본 인본들은 당시 만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영국 장로교 선교사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Mecintyre)가 우리 나라의 서상륜(徐相崙)과 이응현(李應賢) 등의 도움을 얻어 번역을 하고 글자본을 써서 활자를 만든 다음 북중국에 있는 영국 성서공회에서 3천부를 찍어 만주 및 한반도에 배포하였다.

1883에는 영국 성서공회가 우리 나라의 성서 사업을 맡기로 협정되어 전 해에 간행된《누가복음》과《요한복음》을 다시 고치고, 새로《마태복음》과《마가복음》을 함께 만주에서 간행하였다.

그리고 1884년에는 일본에 건너 간 관비 유학생 이수정(李壽禎)이 번역한《마가복음》을 미국 성서공회가 일본 요코하마에서 간행하였는데, 이듬해 미국 초대 선교사였던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이 성서를 가지고 인천으로 들어왔다.

이처럼 최초의 근대식 한글 납활자는 성경을 인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양의 선교사들에 의해 일본과 중국에서 만들어졌으며, 이중 일부의 활자는 훗날 국내로 들여와 성서를 간행하는데 계속 사용되었다. 당시의 간행된 한글 서적들은 한문 읽기에 능숙하지 못한 부녀자나 일반 서민들에게 가장 접근하기 쉬운 선교 매체였으며, 서양 종교에 대한 호기심을 쉽게 접근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되었던 탓에 널리 활용될 수 있었다.



2) 활판 인쇄술의 도입

우리 나라에 근대식 납활자와 활판 인쇄술이 처음으로 상륙한 것은 1881년 12월 10일 부산에서 창간된 <조선신보(朝鮮新報)>를 기점으로 한다. 이는 부산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의 상인단체인 재부산항상법회의소의 기관지로 발행된 것인데, 10일 간격으로 낸 정기 간행물이었다.

이 간행물의 내용은 그 발행기관이 상인 단체였던 만큼 경제 분야의 기사가 주된 범위였고, 그 밖에 잡보나 상황(商況) 등으로 꾸며져 있었다. 구독 대상이 일본인이긴 했으나 한국인들에게도 보이기 위해 당시 전용되고 있던 한문을 주로 사용하였다.

<조선신보>는 발간 주체가 비록 일본인이긴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 근대식 납활자를 최초로 사용한 인쇄물이었다. 그러나 단지 일본인에 의해 일본 거류민을 대상으로 인쇄 반포된 인쇄물이었기 우리 나라 인쇄문화 발전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 민족에 의해 직접 수입된 근대식 납활자와 활판 인쇄술은 1883년 7월 새로운 문물과 제도에 따르는 신문이나 서책들을 출판하기 위하여 통리아문(統理衙門) 관하에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인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고 동년 10월 1일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하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근대 인쇄술의 도입 기운은 그 이전부터 이미 싹트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1876년 2월 일본의 무력 외교에 굴복하여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함으로서 흥선 대원군 정권 이래의 쇄국정책을 무너뜨리고 개항을 하게 되었다. 조약이 체결된 이후 일본은 자신들의 문명개화 실상을 견문토록 하여 조선 정부에 영향을 줌으로써 차후의 협상을 원활히 할 목적으로 사절단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그해 4월 파견된 수신사 일행은 2개월간에 걸쳐 일본의 관공서와 산업시설 등을 견학하였다. 이때 수신사의 일원이었던 김기수(金綺秀)는《일동기유(日東記游)》를 저술해 일본의 근대 문물을 소개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활자 인쇄의 정교함과 신속함에 감탄하고 신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조선 정부는 일본 개화의 실태를 보다 정확히 알고자 1881년 신사유람단을 파견했는데, 이들도 조지소(造紙所)와 인쇄소 등을 시찰하고 근대 인쇄술의 경이로움과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1882년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박영효(朴泳孝)는 민중을 계도하고 국력을 부강하게 하려면 무엇보다 신문의 발간이 필요하다고 보고는 이듬해 귀국 길에 신문 발행에 필요한 납활자와 활판 인쇄기 등의 시설을 들여왔다. 이때 들여 온 인쇄기는 일본에서 제작된 수동식 활판기였다.

박영효는 시설 도입과 함께 신문 제작을 도와 줄 이노우에(井上角五郞)를 초빙하고 수명의 인쇄 기술자까지 데리고 왔다. 이노우에는 박문국에 채용되어 신문 제작을 돕고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활판 인쇄술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갑신정변에 적극 개입하고 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파 인사들과 일본으로 도주하여 정변의 전말을 상부에 소상히 보고하는 등 우리 나라를 일본에 예속시키려는 정치적 야망을 내 보이기도 했던 인물이다.

박문국은 1883년 10월 1일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근대식 납활자와 활판 인쇄기로 <한성순보>를 간행하여 공보(公報) 중심으로 시사적인 내용을 게재하였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 발행된 최초의 신문이다. 비록 순한문으로 발행되긴 했으나 외국 난에는 동서양 각국의 소식을 게재하고, 국내 소식으로는 정부 각 부처의 소식과 일상 생활에 필요한 시중 물가까지도 보도하였다.

신문은 4호 크기의 한자활자를 사용하여 양지(洋紙)에 책자 형태로 발간되었는데, 소형 수동 원압식 활판 인쇄기를 이용하여 찍었다. 신문을 당초에는 한글과 한문을 혼용해 발행할 예정이었으나 한글활자의 미비와 수구파의 반대로 순한문으로 발행되었으며, 발행인은 수구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민영목(閔泳穆)이었다.

1884년 초에는 우리 나라 기술자들이 조판과 인쇄의 전 공정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10월에 갑신정변이 일어나 개화파들에 의해 민영목이 살해되고 수구파들의 선동으로 박문국이 파괴되면서 활자 및 인쇄 시설이 모두 불타게 되어 <한성순보>의 발행은 중단되고, 박문국의 근대식 인쇄시설은 개화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한성순보>를 개화파들의 정치적 선전 도구로 내 몰았던 수구파 인사들도 신문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어 1886년 1월에는 <한성주보(漢城周報)>라는 이름으로 16면 짜리 책자 형태로 복간하였다. 신문의 본문은 국한문을 혼용해 제작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체(新文體)이다. 그러나 한성주보는 운영난을 겪다가 창간 2년반 만이자 박문국이 완전히 폐지된 1888년 7월에 폐간되고 말았다.



2. 근대 인쇄술의 발달

(1) 활판 인쇄술의 보급

박문국이 설치되어 <한성순보>를 발간하기 시작한 이듬해에는 광인사인쇄공사(廣印社印刷公社)가 설립되어 서책들을 인쇄해 내기 시작했다. 광인사는 원래 목활자로 인쇄를 하던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재래식 인쇄소였으나 일본에서 활판 인쇄기와 납활자를 도입하여 서양식 인쇄시설을 갖추고 1884년 2월에 합자회사 형태로 새롭게 출범했다.

광인사는 최초의 근대식 민간 인쇄업체이지만 당시에는 인쇄와 출판이 명확히 분리된 개념이 아니었기에 인쇄와 출판을 함께 겸하고 있었다. 따라서, 광인사는 활판 인쇄술의 보급에 기여했음은 물론 한글 활자까지 완비하고 최초의 국한문 혼용 책자 등을 다수 발간했다는 점에서도 인쇄·출판 문화사적 의의가 크다.

여기에서 간행된《충효경집(忠孝經集)》은 한문으로 되었지만 국내에서 간행된 최초의 납활자 출판물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며,《농정촬요(農政撮要)》는 납활자 도입 이후 국한문을 혼용해 처음으로 제작된 책자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지대하다.

근대 활판 인쇄술의 보급과 발달은 각 종교의 선교 단체들이 운영한 인쇄소로부터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천주교의 성서활판소, 개신교의 배재학당인쇄소, 안식일교의 시조사인쇄소, 천도교의 보성사인쇄소 등은 각각 설립 연도는 다르지만 활판 인쇄술의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1884년 프랑스 신부에 의해 건립 중이던 명동 성당 안에 설치된 인쇄소에서는《텬쥬셩교백문답》,《쟝자로인론》등이 순한글로 간행되었다. 그리고, 1887년에는 배재학당 인쇄부에서 순한글로 된 최초의 신약전서 완역본인《예수셩교젼셔》를 간행하였다.

이 무렵에 간행된 천주교와 기독교 서적들은 당시의 조선 사회에 매우 이질적인 수단이었지만, 이를 접한 당대인들에 있어서는 서구 세계와 그 가치관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고 여러 유형의 선교 책자 제작과 보급이 실현됨으로서 인쇄·출판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당시의 인쇄소들 중에서도 배재학당 인쇄부는 우리 나라 근대 인쇄사에서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1885년 8월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세우고, 이듬해에는 학당 안에 근대식 활판인쇄 시설을 갖춘 인쇄소를 개설하였다.

처음에는 주로 기독교 선교와 계몽을 위한 전단과 책자를 발행하다가 1889년에는 선교사이자 인쇄 기술자인 올링거(Rev F. Ohlinger)를 상해로부터 초빙하여 종교소설인《텬로력뎡(天路歷程)》을 발간하였다. 이 책은 우리 나라에서 출판된 최초의 서양 장편소설이자 국문으로 번역된 최초의 단행본인데, 활자판으로 횟수를 거듭하여 출판되어 신문화 수입의 이정표 역할을 하였다.

배재학당 인쇄부는 발전을 거듭하여 1892년에는 영문 활자와 한글 활자를 직접 주조해서 사용할 만큼 규모가 큰 근대식 인쇄시설을 갖추었고, 1895년에는 중국 상해에서 대량의 자모(字母)를 구입해 오는 한편 제본소를 따로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인쇄 기술공으로 취업하여 일하기도 했다.

특히, 1896년(고종 33) 4월 7일에 창간된 <독닙신문(독립신문)>이 이 곳에서 인쇄할 수 있도록 적극 후원하기도 했으며, 이듬해 2월부터는 아펜젤러에 의해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라는 한글판 주간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독립신문은 갑신정변의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이 미국 시민의 자격으로 돌아와 민중적 정치단체인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그 기관지로서 발간한 것으로 우리 나라 최초로 순한글만을 사용하여 펴낸 순수 민간지이다. 이 신문은 외세 배척과 독립주권 옹호, 계급타파, 민권신장 등 독립협회의 지도정신을 선전하면서 국민들에게 자주독립 의식을 갖게 하고 민권사상을 북돋아 주는 한편 개화사상의 대중적 기반을 확립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배재학당 인쇄부는 일본으로부터 들여 와 사용하던 근대식 납활자를 국내에서는 최초로 주조하여 순한글 신문을 인쇄하였으며, 미국제 자동절단 전지기(全紙機)를 도입하여 최초로 석유 발동기를 사용하여 돌렸다. 여기에다 올링거 선교사가 내한한 1889년부터는 인쇄술을 정식과목으로 채택하여 학생들에게 인쇄 과정에 대한 전반적인 교육까지 실시함으로서 활판 인쇄술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1898년 1월부터는 배재학당의 학생들이 조직한 협성회의 회장직을 맡은 양흥묵에 의해 <협성회회보>가 이 곳에서 발행되었다. 그러나 나라의 개화와 국민의 계몽을 내세웠던 이 회보는 수구파들의 책동으로 이내 폐간되고 말았다. 양흥묵은 이에 굴하지 않고 협성회 회원이었던 유영석, 이승만 등과 협력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순한글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창간하여 정치문제와 개화문물에 관한 기사 등을 실어서 민족의 대변지 역할을 하였다. 이는 배재학당이 인쇄기술의 활용과 보급 뿐만 아니라 신교육과 국민계몽 활동에도 앞장섰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국내에 도입된 납활자와 근대식 활판 인쇄술은 그 편리성과 효용성이 알려지면서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납활자를 이용한 인쇄 방식은 종래의 수공업적인 수동식 인쇄 기구에 의한 것과는 달리 기계화가 된 것이며, 재래식 활자로는 주로 한자 인쇄물을 발행하고 있을 때 납활자로 찍은 인쇄물은 국한문을 혼용하거나 순한글만을 사용하여 인쇄한 것이 이 무렵 인쇄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2) 관영 인쇄소의 설립

근대식 납활자가 도입되고 나서도 관서의 인쇄는 한동안 주자소에 있던 정유자나 정리자, 전사자 등의 고활자를 사용하거나 새로 도입한 납활자를 병용하기도 했다. 특히 갑오개혁 이후에도 학부에서는 단독으로 인서체 목활자를 만들어 많은 교과서를 인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납활자는 도입 직후에는 그다지 널리 이용되지 못하고 작은 활자를 필요로 하는 인쇄물 등에 국한적으로 사용되다가 점차 공공 인쇄는 물론 민간 인쇄에도 많이 이용되었다. 이는 우리의 고활자가 신문화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시기까지는 납활자와 함께 실용적 가치를 지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는 외국에서 인쇄하여 수입해 오던 우표와 엽서 등을 직접 인쇄하기 위해 1896년 관영 인쇄소를 설치하고, 일본에서 조각사 및 인쇄 기술자를 초빙하여 1899년 최초의 우표 시제품을 인쇄하였다. 그러나 인쇄 상태가 선명하지 못해 일본 대장성 인쇄국의 조각사와 제판사를 다시 초빙하였으며, 1900년 3월에는 정식으로 농상공부에 인쇄국을 설치하여 중앙관서의 한 국(局)으로 정식 발족시켰다.

이 때 초빙된 일본인 기술자들은 한국인 인쇄국장보다 직급도 오히려 높았고 대우도 훨씬 좋았다. 이는 초창기의 인쇄기술을 하루 빨리 본 궤도에 올려놓으려는 고육지책으로도 볼 수 있으나 사실은 한반도의 구석구석까지 침략의 야욕을 뻗치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강요에 의해 이뤄졌던 것이다.

1901년 2월에는 상설 주전소(鑄錢所)인 전환국(典 局)에 기존의 주조과 외에 인쇄과를 신설했다. 이어서 한달 후에는 농상공부의 인쇄국을 폐지한 다음 조각 및 인쇄시설 일체를 전환국으로 옮김에 따라 일본인 기술자들도 모두 전속되었다. 전환국의 인쇄시설은 모두 독일에서 도입한 것이었으며, 각 부서의 책임자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전환국에서는 그해 11월 국내에서 생산된 한지를 사용하여 지폐 견본을 인쇄하였는데, 이 지폐는 문자와 도형이 정교하고 은서(隱書)까지 들어 있어 외국 것에 비해 손색이 없었으나 실용품은 끝내 인쇄하지 못한 채 1904년 전환국이 폐쇄되고 말았다. 이는 제판이나 인쇄기술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당시에는 일본의 제일은행권이 국내에서도 자유로이 유통되던 시대였기 때문에 지폐의 실용품을 발행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일본의 내정 간섭이 점차 심화됨에 따라 인쇄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02년에는 일본의 제일은행이 우리 나라에서 은행권을 발행하기 시작하여 재정권이 박탈되었으며, 1904년에는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어 외교권을 빼앗기게 되는 등 주권 국가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1904년에는 일본인 메가타(目賀田種太郞)가 탁지부의 고문으로 앉게 되자 인쇄과와 제지 공장만을 남겨 두고 전환국을 폐지시킨 다음 12월에는 탁지부(度支部)에 새로 인쇄국을 설치하여 전환국의 인쇄 시설과 제지 공장을 이어 받았다.

이처럼 전환국을 폐지시키면서도 인쇄소와 제지 공장을 남겨 둔 것은 이미 계획된 일본의 식민지화를 위한 준비 작업에 소요될 각종 인쇄물 생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인쇄 업무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경찰을 파견하여 탁지부 인쇄국을 경비하도록 하였다.

탁지부 인쇄국은 1906년 3월 1일 불의의 화재로 각종 인쇄 시설이 모두 불타 버렸으나 대대적인 복구 작업을 거쳐 1909년에는 인쇄 공장과 제지 공장이 증축되고 인쇄 및 제지기계, 발전 설비 등이 크게 확충되었다. 특히 인쇄국에는 활판과 석판 인쇄 시설 외에도 활자 주조 시설, 인쇄잉크 제조 시설 등을 갖추게 되었고, 전기 도금 판과 사진 제판술까지 도입되었다.

탁지부 인쇄국이 일본 통감정치의 일익을 맡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활자 개혁을 단행하여 표준 규격의 새로운 활자를 민간 인쇄업계에 보급시키는 한편, 인쇄 기술자를 양성하고 활판 인쇄술의 보급에 기여하기도 했다.



(3) 민간 인쇄업체의 등장

신문물 도입의 영향으로 늘어나는 서책 등 각종 인쇄물의 수요가 늘어나자 최초의 근대식 민간 인쇄업체인 광인사(廣印社)를 기점으로 민간인들의 인쇄업 참여가 점차 이뤄지기 시작했다. 광인사는 일본에서 납활자와 활판 인쇄기를 도입하여 인쇄 시설을 완비하고 한 때는 갑신정변으로 파괴된 박문국 인쇄공장을 대신하여 <한성순보>를 인쇄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간 기업으로서 규모가 짜인 인쇄업체들은 1900년대에 들어와 비로소 등장하였다. 이 무렵에 설립된 인쇄소로 대표적인 것은 광문사(廣文社)와 박문사(博文社)이다. 광문사는 활판 조판과 인쇄 시설을 갖추었고 박문사는 각종 활자의 주조 시설 및 양장 제본 시설까지 갖춘 종합 인쇄소였다.

1905년에는 이종일(李種一)의 보성사(普成社)가 설립되었는데, 이 회사는 8면 활판기 등을 독일에서 수입하고 석판 인쇄시설까지 갖춰 당시 한국인 인쇄소로서는 시설이 가장 좋았다. 1908년에는 최남선(崔南善)에 의해 신문관(新文館)과 보인사(普印社)가 설립되었다. 신문관에서는 최초의 근대 종합잡지인《소년(少年)》을 펴냈으며, 보인사는 활판 시설 외에 석판기와 사진 제판부, 제책부까지 갖추고 있었다.

《소년》은 국판 80여 페이지의 잡지로 구독 대상은 어린이가 아닌 젊은 세대로 하여 세계의 신지식과 신문화를 다양하게 소개한 계몽 교양지였다. 창간호는 표지가 3색도 인쇄인데다가 고급 백상지의 전면 화보 3매를 붙이고 본문의 앞부분 약간은 2색도로 찍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편집이었는데, 이는 신문관의 인쇄기술이 매우 세련되고 우수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구한말의 대표적인 석판 인쇄소로 유명한 문아당인쇄소(文雅堂印刷所)도 이 무렵에 생겼는데, 이 회사는 석판과 사진판, 사진동판, 전기판 등의 인쇄와 목판, 구리판 등의 조각까지도 할 수 있는 시설을 완비하였다. 이 밖에도 수인관, 창화관 석판부, 화문관 석판부 등의 인쇄소가 있었으며, 제판시설을 보유한 일한인쇄, 박문사 등과 인쇄시설을 보유한 석문관, 보문관, 휘문관, 대한국문관 등도 있었다.

이처럼 서울의 인쇄업계는 활기를 띄었지만 지방에서는 이렇다 할 만한 인쇄소가 거의 없었다. 한일합방 전 지방의 인쇄소로는 김홍조(金弘祚) 등이 장지연(張志淵)을 초빙하여 1909년 10월 진주에 설립한 <경남일보(慶南日報)> 인쇄소가 유명했다. 장지연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게재해 일제에 의해 신문이 강제 폐간되고 자신은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 경남일보 주필로 초빙되었던 것이다. 경남일보 인쇄소는 한국인 인쇄소로는 최초의 법인체였는데, 인쇄시설을 고루 갖춰 자체 신문 발행은 물론 외부 인쇄물까지 취급할 정도로 규모가 상당히 컸다.

이처럼 1900년 이후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한 민간 인쇄소는 점차 최신 설비를 갖추면서 각종 도서를 출판하여 국민들을 계도하고 자주 의식을 배양해 나갔는데, 이 무렵의 인쇄소는 날로 쇠잔해지는 국권을 회복코자 하는 우국지사들에 의해 설립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일찍부터 내한하여 거류민단을 조직하고 서울의 용산 일대에 자리잡은 일본인들은 전환국 등 정부의 인쇄소를 지배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설 인쇄소를 차려 인쇄업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의 업체는 시설도 근대적이고 규모도 비교적 컸으며, 서울과 부산, 인천, 원산, 목포 등 개항 도시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영업을 했다

일본인 경영의 인쇄소는 1900년에 원효로에서 문을 연 도산인쇄소(桃山印刷所)를 비롯하여 강천활판소(江川活版所), 대화상회인쇄부 등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1907년에는 10여 개로 늘어났다. 이 밖에 대표적인 일본인 인쇄소로는 서울의 일한도서인쇄소(日韓圖書印刷所), 경성인쇄소 등과 목포의 목포인쇄소, 대구의 대구인쇄합자회사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도 1904년에 설립된 일한도서인쇄소는 일제시대 때 조선서적과 더불어 양대 인쇄소로 이름을 떨치던 조선인쇄의 전신으로, 일본의 침략이 만주와 중국으로까지 확대되자 그 곳으로 보내는 막대한 물량의 인쇄물까지 맡게 되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도 서울을 비롯해 각 지방 도시에 인쇄소를 설립했으나 경험 부족과 미숙한 기술, 자산의 영세성 등으로 크게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더욱이 일본 인쇄인들의 방해공작까지 겹쳐 개화의 일익을 담당한다는 뚜렷한 자긍심과 사명감에도 불구하고 가내 수공업적인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중도에 폐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3. 일제시대의 인쇄

(1) 한일합방과 인쇄의 수난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일방적인 강압으로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일본은 통감부를 폐지시키고 새로운 식민지 통치기구로 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이들의 언론탄압과 민족자본의 말살정책은 영세한 인쇄업계에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한국인 대 일본인 인쇄업계의 역조현상은 더욱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합방이 되기 전에도 이미 일본인 인쇄소가 10여 개소나 되어 업계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합방 후 불과 2∼3년 내에 30여 개소로 대폭 늘어남에 따라 전체 인쇄업계의 8할 이상을 점유하게 되었다. 특히, 새로 개편된 총독부 인쇄공장은 한국인 인쇄업체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구한말의 탁지부 인쇄국도 총독부 직할로 되었으며, 명칭도 총독부 인쇄국으로 바뀌었다.

총독부 경무총감부는 1910년 11월 16일에《초등대한역사(初等大韓歷史)》,《대한지지(大韓地誌)》등 51종의 서적을 판매 금지 시키고 이들을 모두 압수하였다. 이와 같이 출판계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총독부 인쇄국은 민수용 인쇄물까지 흡수하여 한국인 민간 인쇄업계는 크나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총독부는 민간기업 침해에 대한 비난이 높아지자 1911년 4월 인쇄국을 폐지하는 대신 총독관방(總督官房) 총무국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종래의 경무총감부 및 철도국 소속의 인쇄소를 통합시킴으로서 기구를 대폭 축소시켰다. 그러나 1912년 말에는 또다시 식자(植字), 정판, 인쇄 부문에 150명을 신규 채용하였으며, 이듬해 석판, 활판, 콜로타입 등의 시설까지 확장하였다.

이로 인해 생산능력이 크게 확충되자 일제의 만주 통치기구인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와 만철(滿鐵) 등의 주요 인쇄물까지 흡수함으로서 가내 수공업적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인 민간 인쇄업체들은 더욱 크나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총독부는 이어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신문사를 모두 폐쇄시키는 한편 <대한매일신문>을 접수하여 총독부 기관지로 조선어판인 <매일신보(每日申報)>와 자매지인 일본어판 <경성일보>를 발행하였다. <매일신보>는 1912년 3월부터 본문 활자를 4호에서 5호로 교체하는 한편 우리 나라 최초로 프랑스 마리노니 윤전 인쇄기 1대를 신설하였다.

이 윤전기는 시간당 양면 1만 매를 인쇄할 있어 당시로서는 최신식 고속 인쇄기였다. 비록 신문인쇄라는 특수한 목적으로 도입되기는 하였지만, 주로 재래식 족답식(足踏式) 인쇄기에 의존하던 시기에 소활자와 자동 고속 윤전기 시대가 펼쳐진 것은 인쇄기술 발전에 있어 새로운 도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10년대는 총독부의 가혹한 언론 출판의 통제 정책 때문에 한국인 인쇄업체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총독부는 국내에서 간행되는 신문이나 서적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들여오는 각종 간행물조차도 압수나 판매금지 등을 통해 지나칠 만큼의 제재를 가했다. 이 때문에 한일합방 이후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까지는 인쇄·출판문화의 암흑기가 초래되어 인쇄업계는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10년대에 새로 설립된 한국인 인쇄소는 소규모의 몇몇 업체에 불과했는데, 1912년 8월에는 현재 국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보진재인쇄소(寶晉齋印刷所)가 김진환(金晉桓)에 의해 창립되어 초창기에는 주로 석판인쇄를 하였고, 홍순필(洪淳泌)의 성문사(誠文社), 정경덕(鄭敬德)의 복음인쇄소(福音印刷所), 양재관(梁在觀)의 문아당(文雅堂) 등이 이 무렵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서울의 인쇄소 대부분이 일본인들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1917년도 통계에 의하면 국내의 인쇄업체 총 70개 사 중 한국인이 경영하는 업체는 11개 사로 16%에 불과했고, 자본금도 일본인 업체의 13% 정도에 불과했다. 이와 같이 위축되기만 하던 인쇄업이 3·1 운동을 계기로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차츰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였다.



(2) 3·1운동 전후의 인쇄

1) 3·1운동과 인쇄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전국에서 요원의 불꽃처럼 타오른 기미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만큼 거국적인 독립운동이었기에 인쇄인들과 인쇄업계에서도 이 운동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문은 그가 운영하던 신문관에서 조판을 하고 민족 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인 이종일이 경영하던 보성사에서 인쇄를 했다. 옥파 이종일은 한 때 <제국신문> 사장으로 있다가 한일합방 후 보성사와 보성학원이 천도교 산하로 이양되었을 때 손병희의 요청에 따라 보성사의 대표를 맡아보면서 문화보급 운동에 꾸준히 헌신했던 인물이다. 뒷날 이러한 사실이 일본 경찰들에게 발각되자 이종일과 독립선언문의 조판 및 인쇄를 맡았던 인쇄 기술자들은 모두 투옥되었고 보성사는 총독부의 관헌에 의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었다.

이 때부터 한국인이 경영하는 인쇄소는 모두 등록을 하게 되었고 비밀 경찰의 사찰 대상이 되어 민족문화 창달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던 인쇄업계에 대해 노골적인 탄압이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인쇄물 또한 교과서나 단행본, 일반 인쇄물 할 것 없이 모조리 일본인 인쇄사들이 독차지하게 되어 한국인이 경영하는 인쇄소들의 어려움은 말이 아닐 정도였다.

이 당시 인쇄소를 설립한 한국인들은 대부분 사회 지도층 인사로서 인쇄시설은 비록 미미했지만 항일사상과 자주의식이 남달리 투철했다. 따라서, 일본인 인쇄사들과는 설립동기부터 달라 단순히 영리 추구를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 아니라 신문화 보급과 민족의식 배양이라는 사명감에서 출발하였다.

그럼에도 일거리를 모조리 일본인 인쇄소들에게 빼앗겨 경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족보 따위의 자가 출판을 하거나《춘향전》등의 고대소설을 인쇄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한편, 독립선언문을 제작했던 인쇄인들이 투옥되자 인쇄 직공들의 민족 의식도 한층 강화되어 훗날 인쇄직공조합 등을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들은 상호 단결과 애국정신 함양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2) 3·1 운동 이후의 인쇄

1919년 3·1 독립운동은 일제를 한반도에서 쫓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무단정치를 일단 문화정치로 전환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제가 표방한 문화정치는 종전의 인쇄출판에 대한 검열이나 허가제도까지 폐지한 것은 아니며, 단지 종전에 비해 조금 완화되었을 뿐이다.

1920년 1월에는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한 일제에 의해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의 발행이 허가되었다. 당시 한반도의 인구는 2,200만 명으로 이 중 일본인은 16만 명에 불과했음에도 한국인 상대의 국한문 혼용신문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경남 진주의 <경남일보> 뿐이었으나 일본인을 위한 신문은 16개나 되었다. 이처럼 언론이 철저하게 통제되어 오던 중 3개 민간지가 창간된 것은 독립운동의 크나 큰 성과였으며,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희망을 안겨 주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창간 당시에는 자체 인쇄 시설이 없어서 대화인쇄(大和印刷), 대동인쇄(大東印刷), 신문관(新文館), 박문관(博文館) 등의 민간 인쇄업체에서 인쇄를 하였으나, 얼마 후 이들 신문사는 조판시설과 윤전기 등을 갖추고 자체 시설로써 신문을 발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한국인 인쇄소가 잇따라 설립되었다. 1919년에는 신의주인쇄소가 설립되었고 1920년에는 한국인 인쇄소로는 경남일보인쇄소에 이어 두 번째 법인체인 대동인쇄주식회사(大同印刷株式會社)가 서울에서 설립된 것을 비롯해 훗날 서울로 진출한 이근택(李根澤)의 평화당인쇄소(平和堂印刷所)가 황해도 사리원에서 사업을 시작하였다. 또한, 중외인쇄출판사(中外印刷出版社)의 전신인 의성인쇄사(義城印刷所)가 오하수(吳夏洙)에 의해 경북 의성에서, 한규상(韓奎相)의 한성도서(漢城圖書)가 서울에서 각각 설립되었다.

일본인 합자회사인 곡강상점(谷岡商店), 대해당(大海堂) 등도 이 무렵에 창업되었으며, 서울과 지방 등 전국 각지에서 많은 인쇄소가 설립되었다. 또한, 이 때는 인쇄 기술도 발전된 면모를 보여 활판, 석판 외에도 콜로타이프와 오프셋까지도 점차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3) 대규모의 일본인 인쇄소

1923년 3월에는 당시 국내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조선서적주식회사(朝鮮書籍株式會社)가 설립되어 일한도서인쇄의 후신인 조선인쇄주식회사(朝鮮印刷株式會社)와 함께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서적은 총독부 관방인쇄국의 후신으로 조선은행권, 유가증권을 비롯하여 관보 등의 관수 인쇄물과 각급 학교의 교과서를 인쇄해 왔는데, 3·1 운동 이후 날로 고조되는 한국인의 향학열로 교과서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되어 상당량을 일본에서 인쇄해 올 수밖에 없는 데다가 총독부의 예산마저 감소되어 총독부 인쇄공장을 부득이 민간인에게 불하하자 이를 인수받은 것이다.

당시 조선화재보험 가와우치(河內山樂三) 사장 등은 총독부 인쇄공장을 불하 받아 1923년 3월 자본금 200만원으로 조선서적을 설립한 다음 총독부 교과용 도서의 번각 발행권과 관보 발매권 및 조선민력(朝鮮民曆)의 제조 판매권까지 독점하여 불과 10여년 사이에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이 회사는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1936년 서울 용산의 2만여 평의 부지에 건평 1,800평의 인쇄공장을 신축하여 이전하였는데, 명목상으로는 한국인이 주식의 30% 정도를 차지하고 종업원의 절반 이상이 한국인이었다.

조선서적은 2색 오프셋 인쇄기, 2색 활판 인쇄기 및 자동 접지기, 자동 정합기, 표지기 등의 제본 시설은 물론 잉크 조제시설, 철공, 목공예, 자가발전 시설까지 갖추었다. 이 중 2색 인쇄기는 국내 최초의 시설이며, 자동 접지기 및 정합기도 당시로서는 국내 유일의 시설이었다.

한편, 1924년 4월에는 국내 2대 인쇄사 중의 하나인 조선인쇄주식회사가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 회사는 1906년에 설립된 일한도서를 1919년 5월 고스기(小杉謹八) 등이 인수하여 자본금 10만원의 조선인쇄주식회사로 개편한 것인데, 1912년경에 국내에서는 최초로 자동 오프셋 인쇄기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조선인쇄는 이후 지금의 서울 만리동에 대규모 공장을 신축하여 이전했다. 이 곳은 경성역(서울역)이 지척이어서 국내는 물론 멀리 만주에까지 영업권을 확장하기에 매우 편리한 입지였다. 이 회사는 튼튼한 재력과 관의 비호로 성장을 거듭하여 15년 후인 1939년에는 각종 인쇄기 45대, 종업원 500여명의 대규모 기업체로 발전하였다.

시설도 활판, 오프셋, 석판 외에 콜로타이프, 그라비어 인쇄기와 함께 모노타이프 등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그라비어 인쇄기는 그 당시 이 회사에만 있었으며 원색분해도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이러한 시설과 규모를 바탕으로 나중에는 동업조합까지 장악하는 막강한 존재로 등장하였다.

이 밖에도 일본인 인쇄소로는 근택인쇄소(近澤印刷所), 대해당인쇄소(大海堂印刷所), 조선단식인쇄소(朝鮮單式印刷所) 등 규모가 꽤 큰 공장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한국인 인쇄소들보다 규모가 크고 시설도 최신식이었으며, 특히 사진제판 기술은 철저한 비밀주의로 말미암아 일본인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3) 인쇄업계의 성장과 시련

1920년대는 경향 각지에서 많은 인쇄소가 새로 설립되어 발전을 거듭했기 때문에 1910년대를 인쇄업계의 암흑기라 한다면 1920년대는 성장기라고 일컬을 수 있을 정도다. 이때 들어 인쇄소의 설립이 늘고 인쇄 시설이 크게 증설되었음은 물론 모노타이프, 그라비어 등이 처음으로 소개되었고 오프셋 인쇄와 자동화 시설 등의 보급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1920년 10월 1일에는 사상 최초의 인쇄 전람회가 개최되어 많은 관심을 끌었다. 시립도서관 개관 기념 행사의 일환이었던 이 전람회는 인쇄물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만들어진 후 도서관까지 설립하게 되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한 취지에서 개최된 것이었지만, 총독부 박물관에서 고대의 목판과 금속활자, 인쇄도구 등을 출품하고 전환국 인쇄시설을 계승한 용산인쇄소 등에서 당시의 납활자와 석판, 사진동판 등을 전시하여 인쇄역사를 알 수 있게 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도 인쇄업계의 발전이 거듭되어 한국인 경영의 인쇄소들이 많이 생겨났고 시설도 증대되었다. 1930년도에 215개의 공장에서 4,146명이 종업원이 818만원의 생산액을 기록한 인쇄 및 제본업은 1939년도에는 313개 공장에 8,403명의 종업원이 1,838만원의 생산액을 올림으로서 10년 사이에 공장 수는 46%, 종업원 수는 103%, 생산액은 125%의 성장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한반도를 대륙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았고,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부터는 전국을 전시 동원 체제로 개편하였다. 이에 따라 금속, 기계, 화학 등의 중공업 비중이 크게 높아진 반면, 인쇄업 분야는 계속 침체되어 전체 공업 생산액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1930년의 3.1%에서 1939년에는 1.68%로 감소되었다.

1940년을 전후해서도 대규모 인쇄사들이 많이 출현했지만, 교육령 개정으로 각급 학교에서의 조선어과 폐지, 창씨 개명의 강요 등 한민족 말살정책이 강화되고 1939년에는 우리말 사용마저 금지되어 출판업계와 더불어 인쇄업계도 도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특히, 1942년 10월 1일에는 우리의 말과 글을 뿌리째 뽑아 버리기 위해 조선어학회 사건을 날조하여 관련학자들을 대거 투옥시키는 등 비인도적 행위가 심화되자 각 인쇄사에서는 우리글의 인쇄물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고 일본어만이 사용되었다.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1943년부터는 우리 나라 청장년들이 강제로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가게 되면서부터 공장마다 기술 인력이 부족해지고 인쇄용지와 잉크 등 원부자재의 확보도 어려워졌다.

총독부에서는 인쇄용지 난을 해소하기 위해 각 도마다 1개소의 제지공장 설립을 독려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며, 모든 물자가 통제되어 동업조합을 통해 배급제가 실시되었으나 워낙 물량이 부족하여 민간업체에까지는 차례가 오지 않았다.

전세가 날로 불리해지고 연합군의 공습이 심해지면서 각종 산업체를 정비하여 지방으로 소개시키려는 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인쇄업계도 기업통합이 강요되는 한편 지방으로 분산 소개하라는 독촉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간 인쇄업체를 유지해 나가기란 거의 불가능했으나 인쇄소들이 지방으로 이전하기 전에 해방을 맞이했다.



4. 인쇄동업조합

(1) 인쇄동업조합의 태동

우리 나라에서 결성된 최초의 인쇄동업조합은 일본인 인쇄업자들의 친목단체로부터 출발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1907년 5월 5일 일본인 인쇄업자들이 지금의 서울 회현동에 있었던 일본 요정 만선각에 모여 경성인쇄업조합 창립총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모임은 순수한 친목단체로서 규약도 없었고 조합원도 10여명에 불과하였다.

경성인쇄업조합은 1912년 5월 5일 개최된 제6회 총회에서 처음으로 규약을 정하고 임원을 선출하여 비로소 동업조합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조합의 설립목적 및 주요업무는 조합원의 친목과 업무의 연구, 회원 조직의 강화였으며, 기관지로 <경성인쇄시보>를 매월 1회씩 발행키로 하였으나 실제로 발행되지는 못했다.

이 조합이 표면적인 활동에 처음으로 나선 것은 1922년의 일이다. 당시 총독부 관방(官房) 인쇄국의 불하설이 나돌자 그 시설이 다른 유력자의 손에 들어간다면 일본인 인쇄인들이 일대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 하여, 그 해 11월 모임을 갖고 불하 저지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불하 방침을 끝내 막아내지는 못했다.

1929년에는 서울에서 개최될 예정인 대규모 박람회에 소요될 각종 인쇄물을 일본 도쿄와 오사카 등지에서 인쇄해 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또다시 저지운동에 나섰다. 대표단을 총독부에 보내 일본 발주를 반대하고 결의문을 채택하였는데, 당시의 조합원 수는 29명이었으며, 조합장은 사메지마(鮫島宗也)였다.

경성인쇄업조합은 이렇듯 일본인 인쇄업자들의 권익보호와 공동 관심사 해소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인쇄인들의 지위향상이나 기술개발, 경영개선 등의 차원 높은 사업보다는 단순히 업계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수준에 그쳤다.

한편, 한국인 인쇄인들의 친목단체와 동업조합도 생겨났지만 초창기에는 조직적인 단체로 발전하지 못하고 필요에 따라 생겨나 잠시 활동하다가 목적이 달성되면 소멸되곤 하여 지속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다.

1921년에는 서울의 한국인 인쇄공들이 인쇄직공친목회를 결성하고 <인공회보(印工會報)>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 친목회는 점차 발전하여 인공회보를 <연우(鉛友)>로 개칭하여 발간하고 1925년에는 보다 조직적인 힘을 과시하기 위해 조선인쇄직공청년동맹을 결성하려 했으나 총독부에 의해 제지당하고 말았다. 또한, 한국인 인쇄인들의 최초의 동업조합인 부산인쇄직공조합도 생겨났는데, 이 조합은 1925년 11월에 노동쟁의를 일으켜 일본인들 중심의 부산인쇄조합을 상대로 13개 요구 조건을 내걸고 단체교섭을 벌인 결과 원만한 해결을 보게 되어 동업조합의 존재가 차츰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1926년 4월에는 함북 나남의 인쇄직공 친목회에서 나남활판인쇄조합에 대해 처우 개선을 비롯한 5개 항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단체교섭을 벌였다. 1927년 7월에는 경성인쇄직공조합이 결성되었으며, 그 이후부터는 서울을 비롯해 인천, 평양, 부산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노동쟁의를 자주 일으켜 일본인들에게 대항해 나갔다.

그러나 한국인 인쇄인들의 동업조합은 경영자가 중심이 된 일본인 동업조합과는 달리 근로자들 중심으로 생겨나 활동했으며, 노사분규 등이 있어야만 비로소 존재가 표면화되는 친목단체 정도에 불과했다. 따라서 결성 연대나 조직의 규모, 임원 및 사업 내용 등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남길만한 처지가 못되었기에 현재 전해 오는 바가 거의 없다.

이처럼 우리 나라의 인쇄동업조합은 일본인 인쇄업자들이 처음으로 설립하여 활동을 하였지만 친목단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 해산될 때까지 공인을 받지 못했으며, 한국인 인쇄업자들의 동업조합 또한 이슈가 있어야만 생겨나서 활동하는 초보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2) 경성인쇄공업조합

1) 조합의 설립

동업조합은 원래 관련업자들이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조직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경성인쇄공업조합은 당초부터 일제가 국민 총력전의 일환으로 설립한 것인 만큼 설립 초기부터 관제 조직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중일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되고 군수자원의 한계가 드러나자 1938년 '국가총동원령'을 공포하여 전산업과 국민생활 전반을 전시 체제로 편성하였다. 이러한 시책은 한반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산업을 중화학 공업을 주축으로 하는 군수산업 체제로 개편하고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비(非)군수산업의 통제를 강화하여 일반 민수산업의 원료 확보가 어렵게 되자 동업조합의 결성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이질감 등으로 동조하는 사람이 많지 않자 총독부는 1938년 관계법령을 제정, 공포하고 동업조합의 결성을 강제하기에 이르렀으며, 그해 9월 1일 '조선공업조합령'이 시행되자 인쇄업계의 기존 조직인 경성인쇄업조합도 더 이상 존속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일제는 한국인을 대륙 침략의 일원으로 동원하기 위하여 이른바 내선일체를 주창하는 처지였으므로 일본인 인쇄업자들만의 동업조합을 인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동업조합을 통해서 물자를 공급하고 시설 및 생산을 통제하기 위해서도 한국인 인쇄업자까지 포함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또한 통제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인쇄업자 전원을 수용해야 하므로 조합원 자격을 대폭 완화시키는 한편, 인쇄 기술자들을 모두 등록시켜 직장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도록 할 계획까지 세웠다.

이같은 조직 원칙이 결정되자 1939년 4월 22일 경성인쇄조합 설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조합 설립을 위한 준비 절차를 토의했으며, 6월 17일에는 경성상공회의소에서 창립 총회를 개최하고 조합의 정관과 사업 계획 등을 의결, 승인하였다.

이때 채택된 사업 계획은 인쇄 원부자재의 배급과 인쇄요금 협정, 인쇄공의 임금 제정 등을 골자로 한 통제사업, 인쇄롤러 및 재단도 연마설비 등 인쇄 기구의 수리사업, 영업에 필요한 물품의 공급, 그리고 영업에 관한 지도와 조사 등이었다. 이러한 사업은 어디까지나 일본인 인쇄소 위주로 짜여졌다.

창립총회에서는 또한 이사 6명과 상무이사 1명, 감사 3명을 선출했는데, 이중 한국인은 이사 1명, 감사 1명에 그쳐 명목상에 불과했으며, 상무이사는 경찰서장을 역임한 일본인이어야 한다는 원칙까지 세워 임명하였다.

경성인쇄조합은 그 해 8월 21일자로 경성부로부터 설립인가를 얻어 다음날 제1회 이사회를 개최하고 이사장을 선임하는 한편, 24일에는 설립 등기를 마쳐 정식으로 발족하였는데, 이때의 조합원 수는 총 91명이었다.



2) 조합의 활동과 사업

경성인쇄조합은 발족과 더불어 통제 사업을 서두르기 위해 임시 총회를 개최하고 규정에 따라 12명의 통제위원을 선출하였다. 통제위원회는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 인쇄용 원부자재의 공급자를 지정하는 한편, 1939년 10월 1일 현재 조합원사가 보유한 인쇄기계를 일제히 등록시켰다.

이에 따라 119개 업체로부터 활판 인쇄기 449대, 오프셋 인쇄기 30대, 석판 인쇄기 21대, 그라비어 인쇄기 8대, 장부용(帳薄用) 괘선기 23대, 명함 인쇄기 37대, 기타 11대 등 모두 581대가 등록되었다. 그 후 시설 증설과 조합의 신규 가입을 신청해 온 업자들이 있었지만 물자 공급 난의 이유로 승인하지 않았다.

조합에서는 인쇄 기술자들의 이동과 임금까지도 통제하였다. 인쇄 직공들의 이동 방지를 위한 등록제가 실시되어 조합에는 직공들의 신상명세가 기록된 개인별 직공등록 카드가 비치되었고, 등록을 마친 사람에게는 성명, 연령, 직종, 임금, 소속 회사명이 수록된 인쇄직공 수첩이 교부되었다. 이는 인쇄 및 제본직공이 크게 모자라자 기술인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인쇄용지의 확보 문제는 기술 인력보다 훨씬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였다. 용지의 공급량은 해마다 급감하는 데다 관수용과 특수기관용을 우선적으로 확보하고 나서 나머지를 민수용으로 돌리기 때문에 물량이 태부족하였다. 여기에다 용지 확보를 둘러싸고 권력을 앞세운 특수층까지 등장하여 민간업체는 존립마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인쇄용지 사정은 더욱 악화되어 1941년에는 용지의 배급 통제가 실시되었다. 통제기구로 중앙에 양지(洋紙) 배급회사를 설립하고 각 도에는 통제위원회를 두어 공급의 일원화를 시도하였다. 전세가 날로 악화되면서 인쇄용지의 공급 물량이 줄어들자 총독부는 각 동업조합에서 배급하도록 통제기구를 개편하였으나 공급량이 부족하여 신문은 면수를 줄이고 출판업자들은 거의 폐업하기에 이르렀다.

조합은 또한 아연괘와 제책용 봉사(縫 )에 이르기까지 인쇄작업에 사용되는 모든 물자의 수급을 통제하였다. 인쇄잉크는 용지 사정으로 인쇄기의 가동률이 크게 떨어진 탓에 물량 면에서 별로 부족을 느끼지 않다가 1944년 6월에야 비로소 잉크 배급기준이 정해졌다.

한편, 경성인쇄조합은 상공회의소에 있던 사무실을 1939년 9월 서울 중구 명동 2가 34(당시 明治町 2丁目)에 있는 개인집 일부를 빌려서 이전하였다. 이듬해 중구 저동 1가 78(당시 永樂町 1丁目)의 가옥을 매입하여 연건평 40평 정도의 2층 건물을 신축한 후 조합 사무실을 옮겼다.

그러나 공장 건물이 협소하고 배급 물자의 보관 창고가 없어서 불편을 겪자 1942년에는 공장을 증축하고 창고까지 신축하였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조합 사무소와 공장, 창고 등의 건물은 6.25 이후에도 그대로 보존되어 1962년 여름까지 인쇄 단체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조합은 공장 건물이 마련되자 직영공장을 가동하여 관련 시설을 갖추고 재단도(裁斷刀) 연마사업과 인쇄롤러 개체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대부분 내구성이 약한 아교롤러를 사용했기 때문에 하루 걸러 다시 만들어야 했는데, 조합에서 롤러 개체사업을 하게 되자 조합원들이 널리 이용하기 시작했다.

롤러 개체사업은 재단도 연마사업과 합께 조합의 수익사업으로 주요시되어 6.25 이후까지도 계속되었으나 합성 고무롤러의 보급으로 아교롤러의 수요가 줄어들자 공동이용 시설사업도 그만두게 되었다.



3) 경기도인쇄공업조합

경성인쇄공업조합은 1943년 행정 당국의 지시에 따라 경기도인쇄공업조합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개편 과정에서는 정관 중 '경성부'를 '경기도'로 고쳤을 뿐 총회를 거치지 않고 종전 사업을 그대로 승계하는 한편 다른 지구 조합원을 추가 가입시키는 절차를 밟았다.

경기도인쇄공업조합은 1943년 2월 17일 경기도의 인가를 받은 다음, 1939년 3월에 결성한 후 단위조합으로 활동해 오던 인천인쇄공업조합의 12개 사를 조합원으로 받아 들였다.

계속해서 수원, 개성, 안성, 이천 등 경기도 내에 있던 인쇄업체 25개 사와 서울 시내의 소규모 인쇄업체 26개 사의 가입신청을 받아 들임으로서 8월 들어서는 조직이 일단 완료되었는데, 이때 총 조합원은 184개 사였다.

1945년 들어 전세가 날로 악화되어 연합군의 폭격이 늘어나자 총독부는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산업시설을 농촌으로 소개하는 한편, 서울의 대규모 인쇄공장들로 인쇄물 공동수주단을 조직, 인쇄소를 정비하고 지방으로 분산 소개시키려고 하였다.

경기도인쇄공업조합은 1945년 7월 6일 이사회를 소집하고 이 문제를 토의한 결과, 한국인 업체 3개 사와 일본인 업체 13개 사 등 총 16개 사를 선임하여 인쇄물 공동수주단으로 구성하고 각 도에 1개 공장씩 분산 소개시키기로 했다. 경성인쇄집단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던 이들 16개 인쇄소들 중 한국인 업체 3개 사는 김낙훈(金洛勳)의 보진재인쇄소, 노성석(盧聖錫)의 대동인쇄소 그리고 박인환(朴仁煥)의 중앙인쇄소였다.

이에 따라 조합의 기능은 전면 정지되고 모든 소관업무는 인쇄물 공동수주단으로 넘어가게 되었으나, 지방으로의 소개 정책은 업자들의 비협조로 답보 상태에 있다가 8·15 해방을 맞게 되었다.



(3) 조선인쇄연합회

조선총독부는 1943년부터 물자 공급기구를 일원화시키기 위하여 모든 물자를 실수요자 단체인 각 동업조합 중앙연합회에 배당하고 이를 다시 각 도 동업조합으로 할당할 계획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인쇄업계에서도 경성인쇄공업조합을 모체로 한 중앙연합회를 조직하기 위해 1942년 12월 7일 발기인 대회를 개최하고, 12월 20에는 조선인쇄연합회 창립 총회를 개최하였다.

1943년부터는 인쇄용지 등 모든 물자가 조선인쇄연합회에 배정되었고 연합회에서는 이를 각 도의 인쇄공업조합으로 할당하였다. 그러나 1945년 들어 전세가 더욱 악화되면서 연합회를 통해 물자를 공급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게 되자, 총독부에서는 모든 물자를 각 도로 직접 배당하고 도에서는 동업조합으로 배급하게 되었다.

따라서, 물자 통제를 위한 기구로 설립된 조선인쇄연합회는 존재 가치가 없어져 1945년 7월에 해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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